한국 스튜어드십 코드
기관투자자가 수탁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행해야 할 7가지의 세부 원칙과 안내지침을 제시
"ESG는 왜 중요한가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먼저 짚고 넘어간다. ESG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ESG는 기업의 생존을 결정하는 네 개의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투자자가, 고객이, 신용평가기관이, 그리고 정부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이 네 가지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업은 생존할 수 없다.
첫 번째, 돈의 흐름이 바뀌었다.
"ESG가 왜 중요한가요?" 이 질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답한다. "돈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아무리 옳은 명분이라도, 돈이 따라주지 않으면 기업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냉정한 현실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 금융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상을 뒤흔들었을 때, 사람들은 깨달았다. 기관투자자들이 너무 수동적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2010년 영국에서 '스튜어드십 코드'가 탄생했다. 기관투자자가 단순히 돈만 대고 방관하는 게 아니라, 의결권을 행사하며 기업 경영에 적극 관여한다는 원칙이었다. 우리나라는 2016년 제도를 갖추고 2018년 국민연금이 선두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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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금융계에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가 선언했다. "앞으로 지속가능성을 투자 결정의 기준으로 삼겠습니다." 블랙록이 운용하는 자산은 약 10조 달러, 우리 돈 1경 원이 넘는다. 그들은 말만 한 게 아니었다. 환경오염 개선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볼보를 포함한 35개 기업에 의결권을 행사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020년 47조 달러(약 5경 7000조원) 규모를 운용하는 블랙록,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 등 518개 기관투자자가 참여한 '클라이밋액션 100+'가 한국전력공사, 포스코, SK이노베이션을 포함한 전 세계 161개 고배출 기업의 CEO와 이사회 의장들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다. "2050년까지 넷제로(Net-zero) 달성 계획을 공표하라.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배출량의 45%를 감축하라." 이들이 지목한 기업들은 전 세계 산업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의 80%를 차지한다. 더 이상 지구 반대편 이야기가 아니다.
투자자들은 아예 투자 대상에서 기업을 지워버린다. '네거티브 스크리닝'이라 부르는 이 방식으로 네덜란드 연기금은 159개 기업을, 노르웨이 투자운영회는 환경파괴 기업들을, 뱅가드는 중국 군수업체들을 투자 명단에서 삭제했다. 유럽 금융권은 대출 금리를 정할 때도 ESG 평가를 반영한다. ESG 등급이 낮으면 높은 금리를, 높으면 낮은 금리를 부담하는 시대가 왔다.
두 번째, 소비자가 공급망 전체를 본다.
소비자들이 달라졌다. 이제 그들은 물건을 파는 기업만 보지 않는다. 그 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까지, 공급망 전체를 본다.
맥도날드는 2025년까지 100% 재생·재활용 패키징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포장을 줄이고, 재생 가능한 제품을 쓰고, 소비자 측에서도 재활용할 수 있게 하고, 재활용된 제품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단순한 마케팅이 아니다. 소비자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애플은 더 과감하다. 2030년까지 협력업체들이 100% 재생에너지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노동, 인권, 건강, 환경에 대한 행동수칙을 만들고 이를 평가한다. 애플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삼성도, 삼성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들도 모두 ESG 경영을 해야 한다. 세계 1위 화학기업 바스프도 ESG 행동강령을 12개 언어로 번역해 협력업체에 제공하고, 국제 기준 준수를 의무화했다.
EU는 한발 더 나간다. 공급망 전체에 대한 인권·환경 실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EU에 소재한 기업뿐 아니라 EU 시장에서 거래하는 모든 기업이 대상이다. 사실상 무역장벽이 되고 있다.
나는 중소기업 대표들을 만날 때마다 말한다. "당신 회사가 아무리 작아도, 글로벌 공급망 어딘가에 있다면 ESG는 선택이 아닙니다."
세 번째, 신용등급이 ESG를 반영한다.
돈을 빌릴 때도 ESG가 중요해졌다. 무디스, 피치레이팅스, S&P 같은 글로벌 신용평가 기관들이 ESG를 신용등급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S&P는 듀크에너지(Duke Energy Corp.)의 석탄발전소에서 과도한 석탄재가 배출된다는 이유로 신용등급을 'A-Stable'에서 'A-Negative'로 낮췄다. 환경 문제가 신용 문제가 된 것이다. 신용평가 기관들은 ESG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ESG 평가 기관들을 인수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2020년 한국신용평가가 ESG 채권 인증 평가 사업을 최초로 선보였다. 한국기업평가는 평가 방법론을 개정해 ESG 위험 노출도가 높은 산업을 중심으로 ESG 요인을 반영하기로 했다. 친환경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재생에너지를 적극 사용하는 기업이 더 높은 신용등급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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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채권 인증평가
ESG채권이 준거한 원칙, 기준 또는 가이드라인을 준수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한 등급 또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
ESG가 재무적 위험을 넘어 신용위험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좋은 신용등급을 받고 싶다면, ESG를 할 수밖에 없다.
네 번째, 정부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힘은 정부 규제다. 법으로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은 2006년 UN PRI 발표 이후 본격적으로 ESG 공시 강화를 추진했다. 2021년부터 연기금, 은행, 보험사, 자산운용사에 ESG 공시 의무를 확대했고, 영국은 2025년까지 모든 상장기업에 ESG 정보공시를 의무화한다.
우리나라도 2019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에 기업지배구조 정보 공시를 의무화했다. 2021년 금융위원회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공시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2025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2030년 이후에는 코스피 상장사 전체로 확대된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이슈, 탄소 규제가 있다. 2015년 파리협정 이후 전 세계 195개국이 탄소배출 감축에 나섰다. EU는 2023년 10월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CBAM)를 본격 시행했다. EU보다 탄소를 많이 배출해 제품을 만드는 국가에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품목이 대상이며, 2026년부터는 실제 관세가 부과된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무역장벽이다.
탄소 배출 1위 국가 중국도 탄소 다배출 업체에 보고서 작성을 의무화하고 위반 시 벌금을 물린다. 우리나라도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감축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환경 규제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다.
사방에서 포위당한 기업들
투자자가 압박하고, 소비자가 감시하고, 신용평가 기관이 평가하고, 정부가 규제한다. ESG는 이제 사방에서 기업을 압박하는 힘이 되었다.
나는 기업들을 만나며 이런 말을 자주 한다. "ESG를 안 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투자받지 못하고, 고객을 잃고, 대출금리가 올라가고, 법으로 제재받습니다. 그래도 안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협박이 아니라 현실이다. ESG는 이제 기업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네 개의 거대한 힘 앞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다만 언제 시작할 것인가, 얼마나 진지하게 할 것인가만 남았을 뿐이다.
당신의 기업은 준비되어 있는가?
필자 소개
진성한 | (주)한국산업기술경영연구원 대표
공장관리기술사이자 경영지도사로서 30년간 중소기업 현장에서 기업진단과 경영혁신을 실천해왔다.
현재 ㈜글로벌ESG검증그룹 및 K-ESG평가원 진단·평가위원, 메인비즈협회, 인덕대학교 ESG정책연구, ESG 경영컨설팅 전문위원 등 공공기관 및 전문기관에서 활동하며 중견·중소기업의 ESG 경영 정착에 힘쓰고 있다. 건국대학교 벤처전문기술학과 경영공학 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ISO인증 검증심사원이자 ISO인증 국제심사원 양성과정과 ESG 전문가 양성과정의 교육 전담교수로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저서로 《중견·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ESG 완전정복1-ESG 경영의 이해와 실행 지침서》, 《중견·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ESG 완전정복2-지속가능경영보고서와 에코바디스 실행지침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