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SG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1987년부터 2020년까지, 30년에 걸쳐 세계가 쌓아온 합의의 역사
진성한 박사's avatar
Dec 03, 2025
[칼럼] ESG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ESG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이 질문을 참 자주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ESG를 2020년 전후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유행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ESG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가 지구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한 순간, 그리고 "우리는 이대로 가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순간으로 이어진다.

1987년, 미래 세대에게 보내는 경고

이야기는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유엔환경계획(UNEP)과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함께 펴낸 보고서 하나가 세상에 나왔다.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브룬트란트 보고서(Brundtland Report)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나는 이 보고서를 처음 접했을 때,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 한 문장이 담고 있는 무게는 엄청났다. 우리가 오늘 누리는 번영이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빼앗은 대가라면, 그것을 과연 발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보고서는 인류가 빈곤과 인구 증가,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환경파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 서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대재앙을 피하면서도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ESG의 씨앗이었다.

1992년, 리우에서 세계가 약속하다

1992년 리우선언
유엔환경계획이 주도한 리우회의에서 세계 각국은 '리우선언'을 채택

5년 후인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역사적인 회의가 열렸다. 유엔환경계획이 주도한 리우회의에서 세계 각국은 '리우선언'을 채택했고, 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사막화방지협약이라는 세 개의 중요한 환경협약을 만들어냈다.

이 세 협약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ESG의 'E(환경)' 영역의 토대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협약들이 30년 후 기업 경영의 핵심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씨앗은 그렇게 뿌려졌다.

2000년대, 지속가능성을 측정하다

Global Reporting Initiative (GRI)
1997년에 설립된 글로벌 보고 이니셔티브(GRI)

1997년에는 글로벌 보고 이니셔티브(GRI)라는 비영리단체가 설립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기업이 지속가능경영을 한다고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측정하고 보고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었다.

GRI는 2000년에 첫 가이드라인을 내놓았고, 수차례 개정을 거쳐 2016년에는 'GRI 표준(GRI Standards)'을 정립했다. 이 표준은 경제, 환경, 사회 부문으로 나뉘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평가하는 지표를 제시했다. 추상적이던 개념이 점차 구체적인 숫자와 지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2006년, 투자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다

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2006년 결성된 유엔 책임투자원칙 (UN 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전환점은 2006년에 찾아왔다. 유엔 책임투자원칙(UN PRI)이 결성된 것이다. UN PRI는 6가지 책임투자원칙을 발표했다. 투자를 결정할 때 환경, 사회, 지배구조 이슈를 반드시 고려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투자 대상 기업이 ESG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요구하고, 소유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책임투자 원칙의 확산을 위해 협력하고, 그 이행 과정을 보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UN PRI 6대 책임투자원칙

1

투자분석 및 의사결정과정에 있어 ESG 이슈를 반영한다.

2

적극적인 소유권을 행사하여 소유권 정책 행사에 ESG 이슈를 반영한다.

3

투자대상 기업의 ESG 이슈가 적절히 공개되도록 노력한다.

4

투자업계 내에서 책임투자원칙의 도입 및 실행을 증진시킨다.

5

책임투자원칙 이행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협력한다.

6

책임투자원칙 이행에 관한 활동 및 진척 사항을 보고한다.

이것이 왜 중요했을까? 돈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을 포함해 2020년 기준으로 전 세계 3,000개가 넘는 투자사와 기관이 UN PRI에 가입했다. ESG는 더 이상 이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투자의 기준이 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진지하게 ESG를 고민하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17년, 기후변화가 재무 이슈가 되다

2017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TCFD, Task Force on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ures)가 권고안을 발표한 것이다.

TCFD는 기후변화를 환경 문제가 아닌 재무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리스크와 기회요인을 분석하고, 지배구조, 전략, 위험관리, 감축 목표의 네 가지 측면에서 재무정보를 공개하라고 권고했다. 환경이 곧 돈의 문제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2019년, 세계 최고의 CEO들이 선언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2019년 8월,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들의 CEO가 모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RT)에서 역사적인 선언이 나왔다.

Shareholder Value Is No Longer Everything, Top C.E.O.s Say - The New York Times

애플, 아마존, 월마트, 블랙록의 CEO를 포함한 181명의 최고경영자들이 서명한 이 선언은 기업의 전통적 목적이었던 '주주 이익 극대화 원칙'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대신 고객, 직원, 협력사,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을 읽으면서 나는 지각변동을 느꼈다. 자본주의의 심장부, 월스트리트의 리더들이 스스로 게임의 룰을 바꾸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BlackRock's 2020 letter to clients
BlackRock Larry Fink의 2020년 연례 서

실제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CEO 래리 핑크(Larry Fink)는 2020년 연례 서한에서 지속가능성을 투자 결정의 핵심 요소로 삼겠다고 공표했다.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돈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2020년, 다보스에서 세계가 모이다

2020 World Economic Forum
202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202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은 ESG의 원년으로 기억된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지속가능성이 핵심 주제였고, 9월에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측정'이라는 백서가 발간되었다.

KPMG를 비롯한 글로벌 빅4 회계법인이 참여해 작성한 이 보고서는 지배구조, 지구, 사람, 번영네 축으로 지속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를 제시했다. ESG는 이제 철학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경영 시스템이 된 것이다.

씨앗은 이미 오래전에 뿌려졌다

이렇게 역사를 되짚어보면, ESG는 결코 갑작스럽게 등장한 개념이 아니다.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에서 싹튼 지속가능 발전의 개념이, 1992년 리우회의에서 환경협약으로 구체화되었고, 2006년 UN PRI를 통해 투자 원칙이 되었으며, 2019년 BRT 선언과 2020년 세계경제포럼을 거치며 기업 경영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나는 이 긴 여정을 지켜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세상은 변해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한 가지였다. 단기 이익이 아닌 장기 지속가능성으로, 주주만이 아닌 모든 이해관계자로, 경제만이 아닌 환경과 사회를 함께 고려하는 경영으로.

ESG는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30여 년간 인류가 조금씩 쌓아온 합의이자,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당신의 기업은 이 흐름 위에 있는가, 아니면 아직 망설이고 있는가?

필자 소개

진성한 | (주)한국산업기술경영연구원 대표

공장관리기술사이자 경영지도사로서 30년간 중소기업 현장에서 기업진단과 경영혁신을 실천해왔다.

현재 ㈜글로벌ESG검증그룹 및 K-ESG평가원 진단·평가위원, 메인비즈협회, 인덕대학교 ESG정책연구, ESG 경영컨설팅 전문위원 등 공공기관 및 전문기관에서 활동하며 중견·중소기업의 ESG 경영 정착에 힘쓰고 있다. 건국대학교 벤처전문기술학과 경영공학 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ISO인증 검증심사원이자 ISO인증 국제심사원 양성과정과 ESG 전문가 양성과정의 교육 전담교수로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저서로 중견·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ESG 완전정복1-ESG 경영의 이해와 실행 지침서》, 《중견·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ESG 완전정복2-지속가능경영보고서와 에코바디스 실행지침서》가 있다.

Share article

Conta, ISO 인증의 모든 것